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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로아노크 식민지 실종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1587년에 북아메리카 최초의 영국 식민지였던 로아노크 식민지의 주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불가사의한 일을 말합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령으로 1585년 스페인과의 세력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새로운 영토 개척에 나섰고 이를 위해 월터 롤리 경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북아메리카 연안을 탐험하고 정착지를 조성하도록 했습니다. 로아노크 섬으로의 첫 번째 항해는 1584년에 이루어졌고 탐사대는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에 도착하여 원주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 지역이 식민지 건설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월터 롤리 경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려 이 지역을 '버지니아'(처녀의 땅)라고 명명했습니다. 두 번째 항해는 1585년에 이루어졌고 108명의 군인과 기술자들이 로아노크 섬에 도착해 식민지 건설에 착수했지만, 식량 부족과 원주민과의 갈등으로 인해 곧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1586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도움을 받아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해는 1587년에 이루어졌으며 정착민들을 포함한 새로운 그룹이 로아노크 섬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존 화이트라는 지도자가 있었고, 그는 곧 영국으로 돌아가 추가 지원을 요청했으나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인해 화이트는 1590년까지 로아노크 섬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사라진 식민지
1590년 8월 18일 존 화이트가 3년 만에 로아노크 섬으로 돌아왔을 때는 충격적인 광경에 직면했습니다. 남겨져 있던 117명의 정착민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고 식민지는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습니다. 화이트와 그의 일행이 필사적으로 정착민들의 흔적을 찾았지만 유일하게 발견한 단서는 기둥에 새겨진 'CRO'라는 글자와 근처 나무에 새겨진 'CROATOAN'이라는 단어뿐이었습니다. 크로아토 안은 로아노크 섬 남쪽에 위치한 섬의 이름이자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 부족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화이트는 이 단서를 보고 정착민들이 크로아톤 섬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초지 정착 당시 영국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유일한 원주민 부족이 크로아톤 부족이었기에 이 가설은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화이트와 일행은 악천후로 인해 크로아톤 섬을 직접 조사할 수 없었고 결국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후 화이트는 두 번 다시 로아노크섬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정착민들의 실종은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문을 남겼는데 정착민들은 왜 갑자기 떠났는가? 그들은 정말로 크로아톤 섬으로 이동했는가? 만약 그랬다면 왜 그곳에서도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는가? 이런 의문들로 인해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역사학자들에게 다양한 추측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어 일부 유물과 정착민들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실종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최근에는 DNA분석을 통해 원주민들과의 관계를 조사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스터리의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실종의 다양한 추측
로아노크 식민지의 실종 사건은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되었는데 첫 번째 추측은 정착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인해 우호적이었던 원주민들과 합류했을 가능성입니다. 두 번째 추측은 정착민들이 크로아탄 섬으로 이동했지만, 이후 질병이나 다른 문제로 사망했을 가능성입니다. 세 번째 추측은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받아 모두 사망했을 가능성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정착민들이 내륙으로 이동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식량 부족과 원주민과의 갈등으로 인해 더 나은 정착지를 찾아 떠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들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정착민들이 원주민들과 동화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정착민들은 생존을 위해 원주민 사회에 흡수되었을 수 있는데 이는 'CROATOAN'이라는 단서와도 일치하는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2015년, 고고학자들은 로아노크 인근에서 유럽식 도자기와 유물들을 발견했습니다. 첨단 기술의 도입으로 연구 방법이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위성 이미지 분석, 지하 레이더 탐사 등의 비침습적 조사 방법을 통해 과거의 정착지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이 진행 중입니다.
역사적 의미
영국의 초기 북미 식민 정책이 직면한 도전과 제약을 보여주는 역사로 새로운 대륙에서 정착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어려움을 드러냅니다. 일부 원주민 부족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다른 부족과는 갈등을 겪었던 상황은 당시의 복잡한 문화적 정치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후 영국 식민지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로아노크의 실패 경험은 후속 식민지 건설에 있어 더 신중하고 체계적인 접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1607년에 설립된 제임스타운 식민지는 로아노크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철저한 준비와 지원 체계를 갖추고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문화적 상상력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수많은 소설, 영화, TV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었으며, 미국인들의 집단적 기억되고 있습니다. 로아노크의 미스터리는 마치 잊어버린 퍼즐조각과 같습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이 퍼즐 조각들을 맞추려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완성된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답이 아닌 질문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탐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것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배우는 것들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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